지혜 Wisdom from books
하나님? 분류

예수님 JESUS

컨텐츠 정보

  • 749 조회

본문

11b3d38bdab099471df95cc1d9ece084_1658133559_3872.png
 

예수님 JESUS


"제에에에--기랄!" Jeeeeee-sus Christ 성경책이 들어 있는 무거운 백팩을 메고 성경 공부를 하러 대학교의 학생회관 건물로 이어지는 끔찍이도 길디 긴 계단을 오르고 있는데 내 뒤에 있던 한 학생이 그렇게 투덜거렸다(영어권에서 예수님의 이름은 종종 욕설로 사용된다---편집자 주). 나는 고개를 돌려 그 학생을 향해 말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분의 이름을 그런 투로 말하지 말았으면 좋겠네요."(그 학생의 표정이 얼마나 험악하던지) 표정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난 아마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생각 없이 내뱉는 욕지거리들로 예수님의 이름이 더럽혀지는 것에 신물이 난 나는 그냥 듣고 넘길 수가 없었다. 순진하게도 나는 최소한 사람들이 좀더 분별력 있게 예수님의 이름을 사용하게 만들 수 있다고, 아니 어쩌면 사람들이 더 이상 욕지거리를 하지 못하게 만들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린 나의 기대와 달리, 교회 생활과 신학에서 예수님의 이름은 얼마나 다양한 방식으로 더렵혀지고 있는지 모른다.


나 자신은 결백하다고 주장하는 게 아니다. 나 역시도 그분의 이름을 더럽혔고,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그분을 알게 될 그 영광스러운 날이 오기까지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지금은 그분이 정말 어떤 분이셨는지, 그분이 진정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 당시 왜 그런 행동을 하셨는지, 현재와 미래에 그분이 나의 인생과 이 세상에 어떤 의미를 주는 분이신지 정말 궁금할 때가 있다. 물론 그분은 인간의 이해 능력을 무한히 초월하여 존재하는 분이시지만, 우리가 좀더 주의를 기울이기만 한다면 적어도 그분의 이름은 훼손하는 일반적 함정에 빠지는 일은 어느정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이 어쩌다 이런 문제의 중심에 서게 되셨는가? <뉴욕 타임즈> 같은 정평 있는 신문조차 예수님의 삶과 사명을 둘러싼 논쟁들을 보도하면서 '예수 전쟁 Jesus Wars' 이라는 표현을 쓴다.


가장 의미심장한 논란은 루크 티모시 존슨 Luke Timothy Johnson 이 '역사적 예수에 대한 오도된 탐구' the Misguided Quest for the Historical Jesus 와 '전통적 복음의 진실' the Truth of the Traditional Gospels 이라 칭한 것 사이의 갈등 때문에 생겨난 것이 분명하다. 우리는 나사렛 예수의 실제 삶에 대해 얼마나 많이 알 수 있는가? 복음서 기자들의 글을 우리는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가? 교회가 예수님에 관해 우리에게 전해준 사실들을 얼마나 믿을 수 있는가?


우리는 그분이 실존했다는 사실은 의심하지 않는다. 그분을 믿지 않았던 사람들이 남긴 역사적 자료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그분이 실제 존재했다는 사실은 논박할 수 없다. 하지만 그런 그분을 우리는 어떤 분으로 이해해야 하는가?


복음서의 이야기들을 곰곰히 생각해볼수록 내 안에 더 깊이 각인되는 몇 가지 강한 인상이 있다. 가장 두드러진 사실은, 우리에게 알려진 예수님의 일생은 날조되었다고 하기엔 너무도 유쾌하고, 너무도 놀랍고, (복음서 기자를 포함하여) 모든 사람들의 기대와 유난히도 상반된다는 것이다. 예수님 또한 기대와는 너무도 달라서 쉽사리 내칠 수가 없다. 그분은 그 긍휼히 여기심으로 나를 매혹시키시고, 나를 끌어당기시고, 나에게 구애하신다. 또한 그분의 일생, 그분이 일으키신 기적, 그분의 가르침, 그분께서 당하신 고난, 그분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설명하는 글들은 지극히 긴밀한 유기적 연관성이 있어, 어느 한 부분을 부정하면 전체가 다 못쓰게 되어 버린다. 그리하여 결국 나는 그분에 관한 모든 이야기를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 않으면 그분이 지닌 그 자석과 같은 힘, 그 말씀의 위력, 그분에 관한 증언들의 완전성을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나는 그분을 내 마음에서 지울 수 없다. 그분의 가르침은 세상을 살아가는 설득력 있고 강제력 있는 유일한 방법인 것 같다. 하지만 그분은 나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신다. 어쩌면 그것이 바로 대다수 사람들이 성경이 말하고 있는 사실들의 역사성을 지극히 불신하는 주된 이유일 것이다. 일부 학자들이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 기사의 진실성을 부인하고 싶어 하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에 대해 성경이 하는 말에 순종하고 싶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나님께서 예수님 안에서 역사하시는 방식은 사실 감춰진 방식, 즉 연약함과 겸손, 고난과 죽음이라는 방식이다.


내가 가장 놀라는 것은, 예수님의 기적이나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복음서의 기록을 펌하하고 부인하는 사람들은 그분이 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셔야 했는지를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역사적 사실과 유사한 성경의 기록들에 대해 그 신빙성을 깍아내리려 하는 일부 학자들은 예수님이 그저 인간적 증오심의 결과로 돌아가셨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복음서가 상세히 설명하다시피, 예수님께서 자신이 메시아이심을 암시적으로 주장하시지 않았다면 종교 지도자들이 왜 그분을 그토록 증오했겠는가? 만일 예수님의 신성을 삭제하려고 신학자들이 축소시켜 놓은 사역과 가르침에 그분의 삶이 일치되셨다면, 그분의 죽음은 그 형태로 볼 때 그분의 삶의 '자연스런' 결과일 수가 없었다. 단지 평범한 인간으로 사셨다면 그런 죽으심을 당할 리가 없는 것이다.


한편, 예수님의 신성을 받아들이고 믿는다는 사람들 중에도 그분이 엄청나게 그리고 철저하게 고난 당하셨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인정하기를 꺼리는 경우가 자주 있다. 그들은 승리하시는 하나님, 일상생활에서 자신들 역시 승리자로 만들어 줄 수 있는 승리자 하나님을 원한다. 하지만 우리는 고난당하는 종이신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고, 그분은 남을 위해 고난, 심지어 수치까지 당하는 것을 통해 역사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방식임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다. 과연 우리는 기꺼이 어린 양의 방식으로 살다가 죽을 수 있는가?


'예수님' 이라는 이름을, 그 이름이 담고 있는 모든 충만한 것과 더불어 온전히 회복하고자 할진대 "나를 따르라" 는 그분의 부르심, 그리고 "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한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그분은 "네 곰인형을 들고 나를 따르라" 고는 말씀하시지 않았다) 는 그분의 꾸짖음을 과연 무시할 수 있는가? 그분의 이름이 오염된 것은 우리가 사실 그분의 죽음을 함께 나누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일지 모른다. 우리는 여전히 생명을 위해 우리 자신을 죽음에 내어 주는 것이 예수님 안에 계신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역사하시는 방식임을 믿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것만이 주어진 상황과 상관없이 무한한 기쁨으로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데 말이다.



d75e9c95d5cfd1aa1b892260a2a36cfa_1655268800_4474.png
 

♥ 웹선교 후원 : 토스뱅크 1000-0199-7978 (김병일)   

관련자료

댓글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Total 0 / 1 Page
Member Ran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