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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삼덕 : 한국교회의 시작과 여성 리더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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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삼덕한국교회의 시작과 여성 리더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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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주는 “An Understanding of Early Korea Chrisian Women's History"에서 전삼덕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한다.


전도부인으로 복음을 전한 전삼덕에게 기독교 복음은 종교적 범주 이외의 더 큰 의미가 부여되고 있었다. 구원과 독립된 원리들로서 나타나는 한국 여성들의 인간된 권리를 내세울 수 있는 힘이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기독교의 복음은 남성 중심적인 봉건주의적 계급구조로부터의 자유와 해방의 뜻을 가지고 있다.”


이에 대하여, 정석기는 한국교회 잊혀진 이야기에서 사회, 문화적인 접근방식으로 보았을 때 당시의 전도 부인이나 여성들이 소외된 약자들이기만 했는지, 그렇다면 그들의 리더십이 어디서부터 유래하게 된 것인지를 연구해 봐야 한다고 밝히면서, 다른 각도에서 전도 부인들과 한국 여성들의 현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


1843년 평남 강서군(江西郡) 강서면 벽위에서 양반의 딸로 태어난 전삼덕은 어려서부터 한문과 한글을 깨우칠 수 있었고, 17세에 김선주에게 시집을 갔다. 남편 김선주는 우부승지까지 올라 발령을 받아 서울로 올라갔다가 보령으로 갔고, 전삼덕은 1890년 관직을 사임한 남편과 고향인 강서로 돌아왔다. 고향으로 돌아온 전삼덕은 양반집 귀부인이었기에 모든 것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외부 출입은 물론 사람을 만나는 것도 조심스럽게 해야 했다. 모든 것을 가졌지만, 모든 것에서 자유롭지 못한 양반집 귀부인은 또 하나의 시련을 감수해야 했다. 남편의 축첩으로 젊은 여인이 들어오면서 외면당했고, 외로운 규방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삶 속에서 의욕 없이 지내던 전삼덕의 호기심을 자극한 것은 평양에 들어와 있는 예수교의 소문이었다. 누구로부터 복음을 들은 것도 아니지만, 전삼덕은 삶의 돌파구로 예수교를 선택하였다. 그래서 직접 평양으로 찾아가 선교사 홀을 만나게 된다. 홀은 의료선교사로 평양 서문 밖의 시약소(施藥所) 형태의 병원 선교를 하고 있었다. 양반집 부인이 기독교의 진리를 알고자 스스로 찾아온 것은 처음이라 홀 선교사는 더 정성스럽게 가르침을 주었다. 이미 한글을 깨우친 전삼덕을 위해 홀은 신덕경’(信德経)세례문답’, ‘미이미 교회문답등을 내어 주며 가르쳤고 전삼덕의 구도 생활이 시작되었다. 두 며느리를 전도하였으며, 매주 평양남산현교회(平壤南山峴敎會)에 참석하여 신앙의 초석을 세우게 되었다.


휘장세례의 사례는 휘장이라는 작은 구멍을 통해 당시 엄격했던 유교 질설르 볼 수 있다. 이는 유교적 가부장 문화와 전통 속에서 갇혀 살아야 했던 여성들의 삶에 빛을 비춰 줄 수 있는 구멍이 되었다. 기독교 복음을 통해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는 순간 휘장에 구멍이 생겼다는 것은 역사적, 신학적으로 많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는 기독교의 진리를 통해 남녀의 평등한 대화가 시작되었고, 신학적으로는 작은 구멍을 통해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날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되었다는 것이며, 여성의 자유와 해방을 향한 첫걸음이었다.


세례를 받은 전삼덕은 더욱 열심히 예배에 참석하며 복음전도 사역에 동참하였다. 강서읍에 교회가 설립되자, 아이들을 교회에 모아 가르치기 시작하였으며, 매년 개최되는 여자 사경회에도 열심히 참석하여 훈련을 받았다. 1901년 에스티 선교사 평양 지방의 여선교회 사업을 관리하기 위해 부임해 와서 전삼덕을 전도부인으로 채용하여 함종으로 파견하였다. 전삼덕은 열심히 책을 팔고 전도를 하였으나, 부유한 양반의 부인이 책을 팔러 다니는 모습이 이해가 되지 않았던 함종 사람들은 그녀를 조롱하고 비난하였다.


이에 전삼덕은, “내가 예수를 믿기 전에는 자유하지 못했으나, 예수를 알고 이렇게 기쁘고 행복한데 아직 그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이 땅의 여성들에게 자유와 해방의 복음을 전하여, 그들도 나와 같은 기쁨을 누리게 하는 것이 좋은 일 아닌가? 라고 그들을 설득하며 전심을 다해 전도인의 사명을 충실히 해나갔다.


이러한 노력으로 함종에는 교인도 늘어가며 교회가 설립되기에 이르렀다. 1910년까지 전도부인으로서 열심을 다했지만 나이와 객지 생활에 의한 병을 이겨낼 수 없었던 그녀는 전도부인 직을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전도인의 삶을 이어갔다. 그 결과 1917학동교회숭덕학교를 설립하게 되었고, 학감으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녀는 여자 아이들을 무료로 가르치면서 남성 우월주의의 유교적 사상을 타파하는 데 앞장섰다.


전삼덕이 북한 지역 최초의 세례자로서 휘장세례를 받았지만, 한국 여성의 현실은 아직도 봉건 체제의 억압된 상황에 있었고 역사적으로 여전히 소외된 여성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그녀를 통해 많은 여성들이 배움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폐쇄적인 압제 속에 신음하던 많은 여성들을 자유의 빛으로 인도했으며 복음의 빛을 더욱 밝혀주는 역할을 온전히 감당한 그리스도의 일꾼으로서 전도부인의 사명을 기쁨으로 감당하였다. 전삼덕 전도부인의 삶을 통해 우리가 본받아야 할 것은 사명의 실천을 위한 기쁨과 열정이다. 그것의 회복이 그녀의 삶을 현재 우리의 삶에 재현하기 위한 근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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