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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링컨 당신을 존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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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컨 당신을 존경합니다를 읽고

데일카네기 지음ㅣ임정재 옮김 



책의 줄거리 링컨의 어머니는 낸시 행크스이며 학교 교육은 전혀 받지 못했다. 스물 두살 무렵에 무식하고 날품을 파는 토머스 링컨이라는 청년과 결혼했다. 1809년 2월12일에 켄터키 주의 한 오두막 집에서 링컨은 태어났다. 어머니 낸시는 링컨이 아홉 살 때 남매와 화목하게 지내고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35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링컨은 가난한 환경에서 성장하였다. 이후에 의붓 어머니 사라 부시의 사랑을 받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링컨은 학교 교육은 약 12달을 받았으며 성경을 읽는 것으로 읽기 공부를 했고, 워싱턴과 제퍼슨의 필체를 따라 쓰며 쓰기 공부를 했고 외우는 일을 계속했다. 그는 필요에 따라 공부를 많이 했다. 그는 25년간 책에 대한 열정에 매달렸다. 그는 독서를 통해서 문체, 말하는 방법, 주장하는 방법, 명연설 법, 법률, 문법, 등을 공부했다.


링컨은 한 때 점원으로 일했던 잡화점을 인수해서 친구와 동업을 했지만 빚만 남기고 파산하고 말았다. 그 당시 파산한 사업자는 다른 지역으로 떠나기만 하면 채무에서 벗어날 수 있었는데 링컨은 그곳에 남아 우체부등의 일을 하며 빚을 갚아나갔다. 이 일로 링컨은 ‘정직한 에이브’라는 별명을 얻었다. 링컨은 뉴 세일럼에서 앤이라는 자매를 매우 사랑하였다. 그러나 1835년 가을에 앤은 장티푸스에 감염이 되어 세상을 떠났다. 링컨은 약 2년 동안 깊은 우울증에 빠지게 되었다. 그는 ‘마지막 잎새’를 읊조리며 ‘죽어야 할 운명’이라는 시 중에서 마지막 2연을 좋아했다. ‘죽어야 할 운명의 인간이 어찌 이리도 당당한가?’


링컨은 앤이 죽은 뒤 2년이 지나서 변호사로서 경험을 쌓기 위해서 스프링필드로 옮겨갔다. 거기서 스피드나 버틀러 같은 친구들의 도움으로 5년 6개월 동안 돈 한 푼 내지 않고 잠자리와 식사를 해결하게 되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링컨은 1837년에 법률 시험에 합격하고 변호사가 되었다. 1839년 한 여성이 링컨에게 구혼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녀는 후에 링컨의 아내가 된 메리토드였다. 메리토드는 족보를 자랑하는 집안에서 성장했고 미국의 대통령이 될 사람과 결혼하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늘 교만했고 자기가 최고라고 생각했다. 화려했고 보석을 좋아했으며 권력을 추구했다. 메리는 화를 잘 내는 성격이었다. 메리는 링컨과 결혼을 약속을 한 후에 링컨의 외모의 무신경함에 화를 냈으며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링컨은 그녀에게 질렸고 두 사람의 사랑은 싸움과 불화로 발전했다. 링컨은 메리와 모든 면에서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으며 결혼하면 비참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링컨은 1841년 1월 1일에 결혼을 약속했지만 결혼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에 깊은 우울증에 빠지고 말았다. 링컨은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메리는 무참하게 짓밟힌 자존심 때문에 링컨과 결혼으로 잃어버린 자존심을 되찾고 싶어했다. 하지만 링컨은 절대로 그녀와는 결혼하지 않을 것을 다짐하고 다짐했다. 그러나 마음이 약한 링컨은 다시 결혼을 결심하게 되었다. 링컨은 자신의 결혼은 지옥가는 것같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1842년11월 4일에 스프링필드에서 메리토드와 결혼하였다. 링컨은 변호사로서 활동을 했는데 다른 변호사들은 주말을 가족과 함께 보냈지만 링컨은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매우 싫어했다. 이웃 주민들은 메리토드가 링컨의 혼을 빼놓을 정도로 성가시게 했고 괴롭혔다고 했다. 메리토드의 소리는 온 동네 주민들이 들었고 그녀가 거칠다는 것을 모든 주민들이 알았다. 메리토드는 하녀들과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결국 링컨의 집은 하녀들의 블랙리스트에 오르고 말았다. 한번은 ‘롱 제이크’라는 괴짜 사내의 조카딸이 링컨의 집에서 일을 했는데 메리토드와 싸움을 하게 되었다. 조카딸은 앞치마를 던지고 짐을 싸서 그대로 뛰쳐나왔다. 롱 제이크가 오후에 조카딸의 짐을 가져가겠다고 링컨의 집에 왔으나 메리토드는 만약 집으로 들어오면 폭력을 쓰겠다고 했고 롱 제이크는 화가 치밀어 링컨에게 달려가 사과를 요구했다. 링컨은 정말 유감인데 솔직하게 말씀드리지만 제가 15년간 매일 겪었던 것을 조금만 참아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이 말을 들은 롱 제이크는 오히려 링컨을 힘들게 해서 미안하다고 사과했다고 한다.


링컨에게는 단란한 가정생활이라는 것이 없었다. 메리토드는 백악관에서 살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기에 결혼하자마자 공화당 국회의원 후보 지명전에 출마하라고 링컨을 거세게 몰아붙였다. 처음에는 패배했지만 2년 뒤에 링컨은 국회의원이 되었다. 그 당시에는 미국은 멕시코와 20개월째 전쟁중이었다. 미국은 노예제도를 지지하는 상원의원을 선출할 수 있는 좀 더 많은 땅을 얻기위해 전쟁을 일으켰던 것이었다. 이 전쟁으로 미국은 텍사스와 뉴멕시코,에리조나 네바다,캘리포니아까지 멕시코 영토의 반을 강제로 빼앗았다. 이를 본 링컨은 대통령이 약탈과 살인, 불명예의 전쟁을 시작했다고 비난했다. 링컨은 심각한 우울증이 있었는데 이것은 정치적인 실망과 비극적인 결혼생활로 인한 것이라고 그를 잘 아는 사람들은 이야기했다.


1854년 미주리 타협안이 폐기됨에 따라 링컨에게는 엄청난 일이 일어났다. 미주리 타협안은 1819년에 노예제도를 합법적으로 인정하는 미주리 주가 합중국에 가입하고자 했다. 그러나 북부가 반대했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공화당원들이 미주리타협안을 준비했다. 이것은 남부는 미주리 주에서는 노예제도를 인정한다는 조건으로 합중국에 가입하게 되었고 북부는 미주리 주의 남부 경계선만 넘으면 어디서건 노예제도를 금지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그러나 스테판 더글러스는 당시의 타협안을 폐지하고 미시시피 강 서쪽에 있는 최초의 13개 주와 면적이 같은 새로운 지역에서 지역에 따라 노예제도를 인정할 수 있도록 하자는 주장을 했으며 그는 타협안을 폐기시키기 위해 국회에서 투쟁을 했으며 그이 발의 안은 통과 되었다.


그는 미주리 타협안이 폐기되면 남부에서는 기꺼이 자신에게 표를 주리라고 생각했다. 반면에 북부에서는 지옥같은 폭풍이 몰아칠 것을 예상했다. 양당의 감정이 격해지면서 결국 국가는 남북전쟁의 거대한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었다. 민주당의 분열은 링컨에게 절호의 기회였다. 링컨은 혼신의 힘을 다해 현실에 맞서기로 마음먹었다. 링컨은 스프링필드 연설에서 불의를 비난했고 억압받는 흑인들을 강하게 변호했고 도덕적 위대함으로 청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감동을 시켰다. 그러나 상원의원 선거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링컨은 또 다시 깊은 우울증에 시달렸다. 사실 링컨은 마흔 아홉이 되도록 온갖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사업에 실패했고 결혼생활도 행복하지 않았다. 정치인으로서는 좌절과 실패만을 맛보았을 뿐이었다.


1858년 여름 링컨은 미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정치대결을 벌였다. 링컨의 정치적인 적수는 바로 더글러스였다. 더글러스는 미국의 우상이 되었고 세계적인 유명인사가 되었고 지명도도 높았다. 이에 비해 링컨은 더글러스와 비교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더글러스와 정치적인 대결로 말미암아 국민모두가 링컨을 알게 되었고 유명하게 되었으며 결국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되는 밑바탕이 되었다. 링컨과 더글러스는 모든 면에서 달랐다. 더글러스는 단신인데 링컨은 장신이었다. 더글러스는 바리톤 목소리였으나 링컨은 테너 목소리였다. 더글러스는 우아하고 사근사근했지만 링컨은 볼품이 없었다. 더글러스는 대중의 우상이 될만한 매력을 가졌지만 링컨은 창백하고 주름진 얼굴을 가지고 있었고 신체적인 매력이라고는 없었다. 더글러스는 멋진 옷차림이었으나 링컨은 촌스런 차림이었다. 하지만 더글러스는 유머감각이 없었는데 링컨은 당대의 최고의 이야기꾼이었다. 더글러스는 어디서나 같은 말을 되풀이했지만 링컨은 어디서나 새로운 말로 연설을 했다. 더글러스는 기회주의 자였으나 링컨은 대의를 위해 싸웠다. 그러나 일리노이주 상원의원 선거에서 낙선하고 말았다.


1860년 봄, 공화당은 시카고에서 대통령 후보 지명을 위한 전당대회를 개최했다. 당시 링컨이 대통령 후보로 지명 되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누구나 후보의 영광이 뉴욕출신의 미남형 윌리엄 시워드에게로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릴리의 도움으로 링컨이 후보가 되었다. 1860년의 대통령 선거에서는 더글러스의 민주당이 분열한 덕분에 링컨은 40%가 못 되는 표를 얻고서도 대통령에 당선이 되었다. 링컨은 25년간 있었던 스프링필드를 떠나면서 연설중 이런 내용이 있다. ‘저는 이제 제게 맡겨진 중요한 일을 하기위해서 워싱턴으로 떠납니다. 항상 저를 돌보아 주시는 하나님의 도움이 없었다면 전 성공할 수 없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도움에 힘입어 성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저와 함께 하시며 여러분들과 함께 하시기에  그리고 좋은 일에 항상 계시기를 믿기에 모든 일이 잘 되리라는 확신과 희망을 가집니다. 여러분이 기도하실 때 저를 보살펴 달라고 기도하시듯 저 또한 주님이 여러분들을 돌보아 주시기를 진실로 바라며 가슴 아픈 작별인사를 마칩니다.’


1861년 3월 4일에 링컨이 대통령에 취임하자 남부 7개 주는 이에 반발하여 분리 독립을 선언하고 1861년에 알라바마주의 몽고메리에서 대표자 회의를 개최하였다. 이들은 수도를 버지니아의 리치먼드에 두고 아메리카 연합을 조직한 다음 노예제도를 인정하는 헌법을 제정하고 제퍼슨 데이비스를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그리고 1861년 4월에 남부가 섬터요새를 공격함으로 내란이 시작이 되었다. 링컨은 7만 5천명을 소집했고 국민들은 애국심에 불타 자발적으로 군에 입대했다. 전쟁이 진행되면서 목숨을 바치고자 하는 50만명의 대군의 규모가 되었다. 1억달러의 돈도 모금이 되었다. 하지만 전쟁을 승리로 이끌 지도자가 절실하게 필요했다. 군사력은 결국 뛰어난 리더쉽에 달려있다고 생각한 링컨은 수없이 무릎을 꿇고 하나님에게 자신에게도 남부의 로버트 리 장군같은 사람을 보내 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했다.


존 포프를 장군으로 임명했으나 거듭 패하고 말았다. 남부의 리장군은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링컨도 위싱턴의 함락을 두려워했다. 북부의 사람들은 교회에서 끊임없이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워싱턴시를 구해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했다. 그런 상황에 링컨의 아들 윌 리가 열병으로 죽고 말았다. 링컨과 메리토드는 깊은 절망에 빠졌다. 전쟁의 상황은 점점 더 치열해졌고 게티즈버그라는 펜실베니아의 한 마을에서 미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결국 리장군은 그 전투에서 패배하고 후퇴하고 말았다. 1863년 11월에 게티즈 버그 국립묘지 봉헌식에서 링컨은 유명한 2분의 연설을 했다. 그 내용 중에 ‘하나님의 가호 아래 이 나라는 새로운 자유의 탄생을 보게 될 것이며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는 이 지상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고 했다. 1864년 5월북부 버지니아에서 그랜트 장군은 리 장군과 맞서게 되었다. 피 비린내 나는 전투는 여름 내내 계속되었다.


국회에서는 예레미야 애가와도 같은 결의안을 채택하였다. 그것은 국민들에게 ‘여러분 죄악을 고백하고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께 사랑과 용서를 구하십시오. 사람들에 의해 우리가 멸망치 않도록 이 세상에서 최고의 통치자이신 주님께 간절히 애원하십시오. 라고 촉구하는 것이었다. 링컨은 거듭 기도하며 절망적인 상황에서 성경을 깊이 묵상하였다. 링컨은 1864년 11월 대통령 선거에서 그랜트 총 사령관이 이끄는 북군의 승리함을 따라 재선에 성공하였다. 1865년 4월 9일 남군의 사령관 리 장군이 그랜트에게 항복함으로 남북전쟁은 막을 내렸다. 링컨은 1865년 4월14일 저녁 워싱턴의 포드 극장에서 존 윌크스 부스의 총에 맞아 다음날 사망했다.



묵상 시편 18:28-30 “주께서 나의 등불을 켜심이여 여호와 내 하나님이 내 흑암을 밝히시리이다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군에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을 뛰어 넘나이다. 하나님의 도는 완전하고 여호와의 말씀은 정미하니 저는 자기에게 피하는 모든 자의 방패시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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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진현

서산 성도순복음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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