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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에 사신 주님을 볼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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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그릇 안에 담긴 보배

내 안에 사신 주님을 볼 때


남편이나 아내를 보고 감탄하고 있는가? '감탄할 거리가 있어야 하죠.' 여전히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지 않은가. 당신의 아내와 남편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같이 계신다. 이것이 얼마나 큰 감탄거리인가?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시고, 내 남편 안에, 아내 안에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얼마나 무시하며 살고 있는지 모른다. 우리가 그 사실에 대해서 믿고 감탄하기 시작할 때부터 역사가 일어난다. 부모님이나 자녀들은 어떤가. 예수님이 부모님과 함께 계시고, 자녀들 안에 계시다는 사실에 대해서 우리는 너무나 무관심하다. 자신에 대해서 오늘도 감탄했는가? 지금도 감탄하고 있는가?


내 안에 계신 주님, 이것은 너무나 놀라운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임하셨고, 내 안에 살아 계신 주님이라는 사실, 질그릇 속에 보배를 담은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더는 나의 약함 때문에 슬퍼하거나 좌절하지 않는다. 우리가 슬퍼하고 좌절하고 낙심하고 절망하는 이유는 질그릇 같은 나만 보고 있기 때문이다. 질그릇인 내 존재만 보니까 실망스럽고, 슬프고, 낙심되어 좌절한다.


성경은 분명히 우리가 질그릇이라고 했다. 질그릇이 '난 왜 질그릇일까' 하면서 실망할 이유가 없다. 우리의 문제는 질그릇 안에 있는 보배이신 예수님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눈이 뜨이면 내 연약함이 더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미국 뉴옥에서 정신과 의사로 개업하고 계신 어느 집사님이 한국에 잠깐 나왔던 길에 우리 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다. 그 분이 가시면서 나를 가리켜서 이렇게 쓰인 것을 봤다. "앞에서 보아도 목사고, 옆에서 보아도 목사고, 뒤에서 보아도 목사다."


나는 그 글을 읽고 절망했다. 내가 가진 열등감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노래도 잘하고 싶고, 춤도 잘 추고 싶고, 운동도 잘하고 싶고 공부도 잘하고 싶었다. 노래를 부르면 가수처럼 부르고, 춤을 추면 댄스를 전공한 사람처럼 추고, 운동을 하면 운동선수처럼 하고 싶고, 공부를 하면 천재처럼 하고 싶었다. 그래서 앞에서 봐도 목사고 뒤에서 보아도 목사라는 것이 내가 가지고 있는 열등감이었다. 나는 아무것도 잘하는 게 없다. 그냥 목사밖에 할 게 없다.


지금은 담담하게 이야기할 수 있지만, 어린 시절부터 성장하면서 신학교에 가고 목회를 하면서 그건 나에게 너무나 큰 열등감이었다. '나는 아무엇도 잘하는 게 없어, 나는 재주가 없어.' 그런데 지금은 감사하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만 붙잡고 사는 것 같다. 잘하는게 없으니까 계속해서 예수님만 바라보는 것밖에 할 게 없다.


주님 앞에 섰을 때에 주님은 나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만 더 아는 일은 평생을 해도 행복한 일이다. 어떤 일이 이보다 더 행복할 수 있을까? 어떤 일이 이보다 더 안전할 수 있을까?


예수 그리스도, 살아 계신 주님, 나와 함께하시고 내 안에 계신 주님을 내가 안다는 것은 나의 약함이 더는 문제가 되지 않고, 그렇게 행복한 것이다.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수 있게 되면, 어떤 환란도 문제되지 않는다.


"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고후4:8,9).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말하고 싶은 것이었다. 우리가 질그릇 속에 보배를 가졌다는 것이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는가? 욱여쌈을 당해도, 답답한 일을 당해도, 박해를 받아도,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우리는 망하지 않는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오셔서 살아 계시는 축복이다.


우리 교회에 한 장로님이 계신다. 그 장로님은 <지선아 사랑해>의 작가 이지선 자매의 어머니이시다. 지선 자매는 음주운전자가 운전하는 차에 의해 교통사고를 당해 차가 불타면서 그로 인해 전신화상을 입었다. 지선 자매가 병원 중환자실에 있을 때, 하루에 3번, 30분 동안의 면회시간에 어머니가 딸을 만나러 갔다.


딸은 시종일관 엄머의 눈을 본다. 자기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 살아날 수 있겠는지, 고침을 받을 수 있는지 엄마의 눈을 보고서 판단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엄마는 중환자실에 들어가서 밖에서 일어난 일을 아주 재미있게 이야기한다. 딸에게 일어난 일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처럼 태연하게 눈빛 하나 흔들림 없이 딸을 돌보아주고는 중환자실을 나오는 복도에서 주저앉고 만다. 30분 동안 딸이 자신의 눈을 보고 심각한 상태를 눈치채지 못하게 하려고 하루에 세 번, 쇼 아닌 쇼를 한 것이다.


그런데 지선 자매가 일반병실에 오게 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이제는 하루 종일 같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 말은 하루 종일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딸을 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장로님이 고백했다.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가능했어요. "그러나 도무지 막심되고 절망스런 마음을 주체할 수 없는 순간이 있었다고 한다.  "하나님, 감사한 척할 수 없어요. 진짜 감사한 게 있어야 감사하지, 언제까지 감사한 척할 수는 없잖아요. "이렇게 부르짖을 때 하나님이 지혜를 주셨다. "한 가지만 찾아봐, 감사할 이유를 매일 한 가지만 찾아봐."


'그렇구나. 하나만 찾아보자. 뭐가 감사하지?' 그래서 첫 번째 감사제목을 찾았다. "발은 씻길 수 있잖아. 하나님 너무 감사합니다." 그날은 온종일 딸을 보면서, 감사할 수 있었다. 두 번째 감사한 제목은 "엄지손가락 하나는 남아 있잖아. 하나님 감사하빈다"였다. 그다음 날은 "눈은 다치지 않아서 볼 수 있잖아. 하나님 너무 감사해요"라고 했다. 하나님이 계속 감사할 이유를 매일 하나씩 주셔서 그렇게 그 시간을 이겨왔다고 한다.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 내 안에 살아 계신 주님, 그 주님은 우리를 어떤 상황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꼬꾸라지지 않고, 싸이지 않고, 망하지 않게 만들어주신다. 그래서 우리 안에 오신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막연하게 믿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교리로만 믿는 것이 아니다. 복음은 예수님 그분 자체이다. 그분이 지금 내 안에 오셔서, 내 안에 살아 계신다. [글, 유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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