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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먹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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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먹는가


지금 당장 가장 큰 문제는 먹는 문제입니다. 이 문제만 알아도 교회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절실하게 깨달을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문화와 연결해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우리말에는 특이하게 먹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처음 만난 사람과도 차 한 잔 하실래요?” 인사하고, 어른들을 뵐 때도 진지 잡수셨습니까?” 묻습니다. 생일에는 미역국을 먹는 것이 중요한 나라입니다.


절대 먹으면 안 되는데 먹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나이입니다. 나이를 자꾸 먹으면 결국 죽으니까요. ‘나이먹는다고 말하는 민족은 아마 전 세계에서 한국밖에 없을 것입니다.


축구에서도 한국 사람들은 먹는 게 있습니다. 축구공이 자기 골문으로 들어오는 것을 전 세계 사람들이 모두 실점했다’(lost)고 하잖아요.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골을 먹었다고 한단 말이지요. 남의 공을 우리가 먹는다는 것입니다. 상대보다 많이 먹으면 결국 지게 됩니다.


한 초등학교의 선수 시간이었습니다. 선생님이 사과 다섯 개 중에 두 개를 먹으면 몇 개가 남느냐고 질문했습니다. 학생은 계속 두 개가 남는다고 대답했습니다. “다섯 개 중에 두 개를 먹으면 세 개가 남아야지라고 선생님이 타이르자 우리 엄마가 먹는 게 남는 거라고 그랬어요?라고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나라는 먹는 것을 중시하는 나라입니다. 사실 이 부분에서 한국 사람으로서 콤플렉스가 있었습니다. ‘먹는다는 것은 물질적이고 일상적이고 경제적인 것이기에 한국인의 영적 빈곤을 보여 주는 언어 사용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자세히 읽어 보니 그렇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선악과를 따 먹는 이야기에서부터 최후 만찬의 이야기까지 전부 먹는 이야기였습니다. 먹는 것으로 시작해서 먹는 것으로 끝나는 게 성경이었던 것이죠. 알고 보니 먹는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고 귀중한 말이었습니다.


먹는 것처럼 구체적인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하루에 세 끼 밥을 먹습니다. 세 번이나 먹는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돌아가시기 전 유월절 식사에서 이처럼 습관적으로 먹는 것의 의미를 전혀 다른 차원으로 바꿔 놓으셨습니다. 바로 성만찬의 제정입니다. 예수님은 평소처럼 제자들과 함께 드시던 식탁의 빵과 포도주를 들어 이것은 나의 몸이요, 나의 피다라고 하셨습니다. 죽음을 앞두고 선보이신 마지막 행위가 함께 빵을 나누는 식사였다는 것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예수님은 부활하시고 나서 얼굴도 형상도 모두 달라지셨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도상에서 한참이나 길을 같이 걸었던 제자들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으니까요. 그들은 돌아가시기 전과 똑같이 빵을 떼어 주시는 모습을 보고 나서 예수님이신 줄 알아보았습니다. 오늘날 교회도 먹다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정확히 이해하면 지금 교회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먹다의 의미는 우리가 생각하고 알고 있는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우리는 말 그대로 먹는 것으로 생각해 사람들에게 빵을 나눠 주었는데, 이제는 다른 차원에서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사회 복지의 핵심은 사람들을 제대로 먹이는 것입니다. 교회 역시 사회 속에 들어가 사람들을 먹이는 데 최선을 다합니다. 그런데 교회가 먹이는 것이 세상이 먹이는 것과 같아도 됩니까? 말 그대로 먹는 것을 나눠 주면 그것이 기독교 복지가 됩니까? 우리는 주기도문을 고백할 때 일용할 양식(daily bread)을 주시고라고 고백합니다. 일용할 양식을 옛날에는 하나님이 주셨지만, 지금은 보건복지부나 정치인들이 주려고 합니다. 교회가 줄 수 있는 것이 단순한 일용할 양식(daily bread)이라면, 사람들은 더 이상 교회에 나올 이유가 없습니다. 빵을 줄 수 있는 대통령이나 정치인을 찾아가겠지요. , 교회의 복지는 정치나 사회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복지와 달라야 합니다. 예수님의 먹는 것을 제대로 이해하면 교회의 복지 개념도 달라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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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림을 모르시는 분은 아마 없겠지요. 장 프랑수아 밀레(Jean François Millet)가 그린 이삭 줍는 여인들입니다. 그림을 보면 세 여인이 이삭을 줍고 있습니다. 밀레는 매우 가난한 마을에서 자랐고, 자살까지 시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밀레가 그린 이 농촌 풍경은 겉보기에는 대단히 목가적이지만 실은 가난과 고통과 슬픔이 배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세 여인 뒤에 어마어마하게 많은 곡식이 쌓여 있습니다. 그 주변에 많은 수확물과 잘사는 사람들의 수레 같은 것이 보입니다. 한편 그림 전면에 나오는 세 여인은 남들이 수확한 풍성한 곡식은 물론 입에 들어갈 것도 없어 남들이 미처 다 담지 못하고 흘린 이삭을 줍고 있습니다.


기독교적인 메시지를 모르는 사람들은 당시 이 그림을 사회주의적인 시각으로 해석했습니다. 지주들이 수확물을 전부 가져가고, 농민들은 결국 착취만 당한 채 이삭이나 줍는 가난하고 고통받는 신세가 된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달랐습니다. 밀레가 이 그림을 통해 묘사하려 한 것은 사회 고발이 아니었습니다. 사실은 그림 속 세 여인이야말로 행복한 자들이며 하나님의 은총을 가장 많이 받은 이들임을 묘사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부자만이 아니라 가난한 이들을 위해 이삭을 남겨 주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밀레는 이 그림을 통해 바로 이 점을 묘사하려 했습니다.


이 그림을 보면서 사회 부조리, 약자에 대한 고발, 동정 등으로만 해석해 정치나 혁명으로 끌고 가는 것은 기독교적인 메시지가 아닙니다. 기독교적인 메시지는 그 차원을 넘어서지요.


역사적으로 숱한 혁명과 갈등과 싸움이 끊임없이 일어났지만 결코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구제의 방법을 달리해야 합니다. 가난하고 비참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문제라면, 기독교 진리에 근거한 구제 방법을 택해야 합니다. 한국 교회는 바로 이 점을 모색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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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그림은 밀레의 만종입니다. 앞서 본 이삭 줍는 여인들에서처럼 가난한 농부들이 그러져 있습니다. 그림 속의 두 사람은 잘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고된 삶을 살아가는 이들입니다. 메마른 땅에서 곡식을 얻어먹고 살기 위해 힘든 노동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라면 불평하겠지요. 왜 우리만 온종일 땀 흘려 일해야 하느냐며, 그렇게 일해도 하루 세 끼 먹기 어렵다고 투덜거릴 것입니다.


그런데 만종의 부부는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메마른 땅에서 곡식을 줍고 스스로 일해서 먹을 것을 얻는 것은 자신들의 노력 때문만이 아니라 하늘에서 비가 내리고 구름이 가려 주어 하나님이 허락하신 음식을 조금 얻어먹는 것이라며 감사 기도를 드립니다. 허허벌판 속에 아무것도 잘 보이지 않는 것 같지만 멀리 교회 종탑에서 들려오는 종소리가 저녁 기도 시간을 알리고 있어요. 부부는 저녁노을 아래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 번 수정한 이 그림을 적외선으로 투시했을 때 이상한 것이 보였다고 합니다. 부부의 발밑에 있는 바구니가 죽은 아이의 관이라는 것입니다. 아이의 관을 놓고 하나님이 자신들의 아이를 빼앗아 가셨다고, 아이가 죽었다고 하염없이 슬퍼하고 있다는 것이빈다. 행복한 감사 기도가 아니라는 해석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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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해석의 단초는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였습니다. 달리는 이 그림을 다른 시각으로 해석했습니다. 기괴한 화가로 알려진 달리는 그림 속 여인이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 여인을 남편을 잡아먹는 버마재비(‘사마귀를 일상적으로 부르는 말)로 해석해 발아래에 어린아이의 관을 두었다고 보았습니다. 묘하게 꽂혀 있는 쇠스랑을 성적 욕망으로 해석하기도 했습니다.


똑같은 그림인데 하나님을 믿는 사람과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의 시각이 이렇게 달라요.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도 어렸을 때 집에 만종이 걸려 있었지만 뭔지 모르고 보았습니다. 기독교를 믿지 않는 유교 집안이라 종교화라기보다는 그저 그림으로 이해하고, 부부의 발아래 놓인 바구니에 뭐가 있나 들여다본 기억이 납니다.


우리는 왜 교회에 나옵니까? 왜 하나님을 믿고, 기도를 합니까?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눈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기도요, 우리가 받는 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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