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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아들들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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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아들들은 누구인가?



1. 하나님의 아들들은 왕들이다.

하나님 아들들의 정체에 대해 세 가지 주요 답변이 주어진다. 주후 2세기 중반, 유대인들은 대부분 왕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생각했다. 왕은 사무엘하 7:14, 시편 2:7과 같은 곳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불린다. 이 견해의 지지자들은 시편 82편에서 재판관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용어로 불린다는 점을 근거로 든다. 이 관점에서 볼 때, 여기서 왕 혹은 다른 통치자들은 들의 권력을 이용하여 아름다운 여성들을 잡아들여 일부다처의 하렘(polygamous harems) 안에 넣어 놓기 위해 남용하고 있었다. 이 범죄 행위는 하나님의 분노를 일으켜, 인간의 수명을 120세로 제한하게 했다.



2. 하나님의 아들들은 셈의 후손이다.

두 번째 견해는 그들이 셋의 후손이라는 해석이다. 이 견해는 경건한 셋의 후손이 하나님의 아들들이며, 사람의 딸들은 가인의 후손이라고 생각한다. 창세기는 아담에게서 나오는 두 가지 계보를 보여 주는데, 첫 번째 계보는 가인을 통한 것이고(4:17-24), 두 번째 계보는 셋을 통한 것이다(5:1-32). 셋 후손의 계통은 의로운 노아를 거쳐 아브라함과 야곱에게서 나온 선택된 종속으로 이어지는 선택받은 계통이라고 주장된다.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아들(4:22; 14:1)로 불렸다. 이스라엘은 이방인들과 결혼하는 것을 엄격히 금했다. 여기서 우리는 셋 후손이 그 원리를 우습게 여기는 것을 보게 된다. 이것이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이치에 맞을지 모르지만, 왜 가인의 후손을 사람의 딸이라 불러야 하는지는 알기 어렵다. 분명 이것은 어느 족속의 여성을 묘사하든 다 어울린다.



3. 하나님의 아들들은 영적 존재다.

가장 오래되고 선호되는 해석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능력과 권력 면에서 하나님보다는 못한 초월적 존재라는 것이다. 현대적인 용어로 그들을 그들의 특성에 따라 영적 존재(spirits), 천사 혹은 악마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것이다. 다신론자들은 단순히 그들을 신들로 부를지도 모른다. 몇몇 시편들이 그렇게 하는 것과 같다(82:1; 96:4-5; 97:7). 소위 신들과 한 분 진정한 하나님 사이의 관계는 시편 95:3에서 이렇게 선언된다. “여호와는 크신 하나님이시요. 모든 신들보다 크신 왕이시기 때문이로다.” 구약성경은 또한 이 존재들을 신들의 아들들”(sons of the gods, 개역개정에서는 하나님의 아들들”-역주)로 명명한다. 욥기는 그들이 하나님이 주관하는 천상 회의에 참석하는 것으로 그린다(1:6-12; 2:1-7).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섰고 사탄도 그들 가운데에 온지라”(1:6). 거기에서 야웨와 사탄 사이에 오랜 토론이 이어진다. 하나님의 아들들에 대한 이해는 신약성경에서도 추정되는 것 같다.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벧후 2:4; 참고, 6). 베드로후서는 에녹16:1-7:6(기독교 이전 유대인의 작품)에서 발견되는 창세기 6:1-4에 대한 해석을 넌지시 이야기하는 것 같다. 분명히 하나님의 아들들을 천사와 같은 종류의 존재로 이해된다.


현대 독자들에게 영적인 존재들이 인간과 성관계를 가진다는 생각은 받아들이기 어렵지만, 고대인들은 어떤 영웅들은 실제로 신-인간이 혼합된 존재(god-human hybrids)라고 믿었다. 예를 들어, 길가메시는 인간 아버지와 여신 어머니를 두고 있었다. 아이네아스(Aeneas)도 마찬가지였는데, 트로이의 헬레나(Helen of Troy)는 제우스(Zeus)가 아버지였고, 어머니 레다(Leda)는 인간 여성이었다. 4절은 네피림(Nephilim, 참고. 13:33)이 그러한 혼혈 후손이라고 진술한다. -인이 성적 관계를 맺는 전통이 그 배경이 되는 생각일 수 있지만, 그것은 문제의 일부일 뿐이다.


다음 질문은 이것이다. 신들이라 불리는 존재로 인해 시작된 행위 때문에 왜 인간이 비난받아야 하는가? 아마 하나의 단서가 용어에 있을 수 있다. 그것은 창세기 3:6여자의 본즉(saw)먹음직(good)도 하고따 먹고(took)”의 반향인 듯 보인다. 창세기 6:1-2과 비교해 보면 거기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good)보고(saw)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took)." 두 경우 모두에서 우리는 죄인들이 X(열매, 사람의 딸들)좋은(good) 것을 보았고(saw) 그것을 취했다(took)는 것을 읽게 된다. 즉 이것은 타락의 반복이다. 이러한 반영은 죄의 무게를 강조하지만, 그들은 왜 인간이 신들의 행동으로 인해 비난받아야 하는지는 설명하지 않는다.


고대 결혼에 대한 사회적 관습이 그 주제를 명백히 드러내는 것 같다. 비록 신의 아들들이 때때로 여자들에게 결혼을 강요하고 있다고 이해되지만, 본문의 용어에는 그렇게 읽도록 요구하는 것이 없다. 사용된 용어들은 완전히 질서정연한 결혼에 어울린다. 고대 근동에서 결혼은 본디 두 가족을 연결하는 계약이다. 이 계약은 주로 남성들, 즉 신랑의 아버지와 신부의 아버지가 협상한 것이다. 후자는 신랑의 가족이 지급하는 신부의 값(bride price)에 동의함으로 딸의 결혼을 허락해 주어야만 했다. 이 관점에서 인간 편에는 연합에 동의한 책임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이것은 아담이 에덴에서 금지된 열매를 먹으라는 초대를 받아들인 책임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따라서 이 에피소드는 창세기 3장에 나오는 타락의 본질적 특성을 반복하는 것이다.


창세기 3장은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추방하시는 것으로 끝난다.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3:22). 그때 하나님은 인간에게서 불멸을 박탈하심으로 죄를 벌하셨다. 비록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아주 살았을지라도 그렇다. 이번에 하나님은 인간의 수명을 120세로 제한하셔서 죄를 벌하신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다.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6:3).


그러나 짧아진 수명은 실제로 뿌리 깊은 죄의 문제를 다루지 않으며, 성경 전체에서 인간의 죄악에 대한 가장 저주스러운 평가 중 하나가 뒤따른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6:5-6).


인간 행동에 대한 일반적인 정죄인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하였다는 판정 이후에 문제의 근원에 대한 아주 심각한 분석이 따라온다. 5절은 좀더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계획들의 모든 의도가 항상 악하기만 하다.” 마음은 인간 성품의 중심이며, 그것은 감정뿐만 아니라 우리의 정심과 의지가 잇대고 있는 기능들을 통합하는 곳이다. 그것은 누군가를 움직인다. 그것은 사람을 그 존재 자체가 되도록 만든다. 그것은 생각을 만들고 의도를 형성하지만, 창세기 6:5에 따르면 이러한 생각과 느낌은 모두 죄로 인해 망가진다. 의지의 타락이 어디에나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걸 주목하라. “모든 의도가 항상 악하기만 하다.” 이 구절은 모든 생각이 시작부터 근본적으로 악하다고 주장한다. 인간의 타락에 대한 분석에서 이렇게 노골적이며 모든 것을 아우르는 본문은 거의 없다. 하지만 죄가 종종 마음의 세계에 그 기원을 둔다는 것은 성경 윤리에서 받아들여지고 있는 자명한 원리다(예를 들어, 14:1-3; 51:1-10; 13:23).


하나님의 격한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바로 인간 죄의 범위와 깊이다.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6:6). 하나님은 인간의 행동에 대한 반응으로 후회하시거나 유감스러워하실 때 다르게 행동하신다. 그러나 이것은 일반적인 마음의 변화가 아니다. “마음에 근심하시고.” 근심은 완곡한 번역이다. 하나님은 몹시 분개하신다. 이는 디나의 오빠들이 그녀의 강간 소식을 들었을 때와 같으며, 요나단이 다윗을 죽이려는 그의 아버지의 게획을 알게 되었을 때와 같고, 다윗이 압살롬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와도 같고, 버림받은 아내의 경우와도 같다(34:7삼상 20:34; 삼하 19:2; 54:6). 즉 근심은 강렬하고 비통한 후회다. 따라서 하나님은 인간을 말살하기로 계획하신다. 이렇게 이 짧은 구절들은 이전의 이야기들, 즉 타락의 중요성을 강화하는 이 이야기들과 연결될 뿐만 아니라, 그 다음에 등장할 커다란 자료 덩어리, 이것이 노아의 족보다라는 소개로 시작되는 홍수 내러티브를 예고하고는 역할도 한다.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6:7).


여기서 창세기는 죄의 거대한 위험을 거듭 주장한다. 그것은 파괴적일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미워하는 것이며 죽음의 심판을 이끄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절망적으로 어두운 상황에서 희망의 빛이 하나 있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6:8).


이것은 홍수와 그 여파에 대한 상세한 이야기 안에서 개봉된다. 노아는 둘째 아담이자 홍수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가족의 가장으로, 법을 엄격하게 순종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그는 방주를 건설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안식일을 준수했다. 이것은 새 창조에 대한 약속의 시작이지만, 노아가 술에 취하고 그의 아들이 행하는 불경함은 새 질서에 죄가 없는 것은 아닐 것임을 보여 준다. 인간은 생존하며, 창세기 10장에서 민족의 목록이 보여 주는 것처럼 생육하고 땅에 번성하라는 명령을 성취했다. 하지만 창세기 11장의 마지막 이야기가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는 것처럼, 인간의 번성에 부정적인 측면이 없는 것은 아니다. 바벨탑은 인간의 어리석음과 교만의 기념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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