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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망하면서 예배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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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망하면서 예배할 수 없다.


이야기 하나

예수님께서 천국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어떤 포도원 품꾼의 이야기를 하셨다. 이 품꾼은 다행스럽게도 아침 일찍 포도원에 들어가서 일을 할 수 있는 특권을 얻었다. 일을 마치고 나면 한 데나리온을 받기로 했으니 오늘 하루 살 걱적은 안 해도 된다. 일이 힘들어도 기쁨이 가시질 않았을 것이고, 마음과 힘을 다해 일을 하면서도 포도원 주인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다 표현하기에는 부족하다고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일을 다 마치고 품삯을 받을 때, 그 마음이 사라져 버리는 일이 발생했다. 저녁 늦게 들어와서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다른 품꾼도 온종일 일한 자기와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받은 것이다. 감사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가슴 속에서 분노가 올라온다. 이제, 이 품꾼은 자신의 신분까지 망각하고 주인에게 따지면서 불평을 늘어놓으며 원망한다.


이야기 둘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이 도저히 생각해 낼 수도 없는 방법으로 홍해를 건넜다. 뒤따르던 애굽 군사들은 그들이 건넌 바닷속에서 전멸되고 이제는 한 사람도 볼 수 없다. 이제 무슨 걱정이 있겠는가? 전능하신 하나님이 그렇게 인도하시는데......, 그래서 기쁨에 겨워 모두 모여 찬송한다.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여호와는 용사시니 여호와는 그의 이름이시로다 그가 바로의 병거와 그의 군대를 바다에 던지시니 최고의 지휘관들이 홍해에 잠겼고......그들이 돌처럼 깊음 속에 가라앉았도다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권능으로 영광을 나타내시니이다......주의 콧김에 물이 쌓이되 파도가 언덕같이 일어서고 큰 물이 바다 가운데 엉기니이다......여호와여 신 중이 주와 같은 자가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으로 영광스러우며 찬송할 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가 누구니이까"(출15:1-11).


이것이 성경에 처음으로 기록된 찬양이다. 찬양의 내용이 아주 구체적이다. 우리의 찬양도 이래야 한다. 구석구석 그렇게 찬양할 일이 많다. 하나하나 생각해 볼수록 참으로 신기하기도 했고 모든 일이 다 감사할 일이었다. 모세와 미리암의 찬송에 백성은 큰 소리로 '아멘' 하며 화답했을 것이다. 아마도 계시록을 쓴 요한이 들었던 많은 물소리와도 같은 그런 함성이 아니었을까? 그 후 사흘이 지났다. 광야에서 마실 물이 없다. 그러니 그 누군들 기분이 좋겠는가? 그래서 그들은 원망한다. 그 원망의 소리는 하늘에 울린다.


이야기 셋

광야를 지나고 있다. 지금 먹고 있는 놀라운 만나가 이제는 지겨워지기 시작한다. 고기가 먹고 싶은데 고기가 없다. 애굽에는 고기뿐만 아니라 이것저것 먹을 것이 많았는데 여기는 만나 밖에 없다. 만나를 처음 봤을 때는, "이게 뭐냐" 하고 놀라며 감탄했었는데 이제는 "이게 뭐냐" 하는 불만의 목소리가 터져 나온다. 그래서 그 경이롭기만 하던 만나를 이제는 '하찮은 음식' 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다(민21:5). 만나가 이제는 싫다. 아침에 일어나서 만나를 걷으러 가고 싶지도 않다. 차라리 굶는 게 낫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니 이제 그 누군들 감사가 나오겠는가? 우리는 광야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우리 같으면 그렇게 안 했을 텐데" 하면서 쉽게 그들을 판단해 버린다. 그 정도로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고 만나를 먹는 신기한 일들을 경험했으면서 어쩌면 그리 믿음 없이 어리석게 살았는지 모르겠다고도 생각한다. 우리 같으면 그들처럼 불평하지 않고 믿음으로 잘 이겨냈을 텐데 하고 말들을 하지만, 그들에 비하면 지나치게 호화롭다고 여길 만한 생활을 하면서도 아주 작은 일, 조금 불편한 일, 조금 더딘 일에도 하루에도 수없이 불평하고 그로 인해 극단적인 행동도 불사하는 우리의 모습을 생각해 보면, 그리 쉽게 그들을 판단할 일은 아닌 듯하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나선 지 오랜 시간이 흘렀다. 버스나 비행기를 대절해서 이동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광야 체험도 하루 이틀이지, 셀 수 없는 날이 지났다. 불편한 게 한둘이 아니고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이럴 줄 았으면 차라리 따라나서지 않고 애굽에서 그냥 종으로 사는 게 더 나았겠다고 생각할 만하다. 황량한 광야에서 만나만 먹고 사는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니 그들은 너무 서러웠다. 그래서 울고 또 울면서 원망의 말을 쏟아낸다.


위에 세 이야기에는 공통점이 있다. 모두 '원망' 으로 끝난다. 품꾼의 원망에 대해 포도원 주인은 "내가 선을 베푸는 것을 가지고 나를 악하게 보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원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셨을까? 민수기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는 너희가 너희 중에 계시는 여화와를 멸시하고 그 앞에서 울며 이르기를 우리가 어찌하여 애굽에서 나왔던가 함이라....."(민11:20).


하나님은 그들이 원망하는 것을 단순한 일로 여기지 않으셨다.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으로 여기셨다. 원망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여기지 않는 멸시가 되고 경멸의 행위가 된다. 이런 일들에 대해 시편이 무엇이라고 말하는지 보자.


"그들이......여호와께서 행하신 것과 그들에게 보이신 그의 기이한 일을 잊었도다 옛적에 하나님이 애굽 땅 소안 들에서 기이한 일을 그들의 조상들의 목전에서 행하셨으되 그가 바다를 갈라 물을 무더기같이 서게 하시고 그들을 지나가게 하셨으며 낮에는 구름으로, 밤에는 불빛으로 인도하셨으며 광야에서 반석을 쪼개시고 매우 깊은 곳에서 나오는 물처럼 흡족하게 마시게 하셨으며 또 바위에서 시내를 내사 물이 강같이 흐르게 하셨으나 그들은 계속해서 하나님께 범죄하여 메마른 땅에서 지존자를 배반하였도다 그들이 그들의 탐욕대로 음식을 구하여 그들의 심중에 하나님을 시험하였으며 그뿐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여 말하기를 하나님이 광야에서 식탁을 베푸실 수 있으랴 보라 그가 반석을 쳐서 물을 내시니 시내가 넘쳤으나 그가 능히 떡도 주시며 자기 백성를 위하여 고기도 예비하시랴 하였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듣고 노하셨으며 야곱에게 불같이 노하셨고 또한 이스라엘에게 진노가 불타 올랐으니 이는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며 그의 구원을 의지하지 아니한 때문이로다 그러나 그가 위의 궁창을 명령하시며 하늘 문을 여시고 그들에게 만나를 비같이 내려 먹이시며 하늘 양식을 그들에게 주셨나니 사람이 힘센 자의 떡을 먹었으며 그가 음식을 그들에게 충족히 주셨도다 그가 동풍을 하늘에서 일게 하시며 그의 권능으로 남풍을 인도하시고 먼지처럼 많은 고기를 비같이 내리시고 나는 새를 바다의 모래같이 내리셨도다 그가 그것들을 그들의 진중에 떨어지게 하시 그들의 거처에 두르셨으므로 그들이 먹고 심히 배불렀나니 하나님이 그들의 원대로 그들에게 주셨도다 그러나 그들이 그들의 욕심을 버리지 아니하여 그들의 먹을 것이 아직 그들의 입에 있을 때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노염을 나타내사 그들 중 강한 자를 죽이시며 이스라엘의 청년을 쳐 엎드러뜨리셨도다 이러함에도 그들은 여전히 범죄하여 그의 기이한 일들을 믿지 아니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날뜰을 헛되이 보내게 하시며 그들의 햇수를 두려움으로 보내게 하셨도다"(시78:10-33).


원망하는 것은 지존자를 배반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라고 한다.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하고 있다.


잊어서는 안 되는 것

결국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행위가 되고 마는 이 '원망' 은 도대체 왜 생겨나는 것일까? 위의 세 이야기에서 동일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그것은 은혜의 망각이다.

그들은 모두 '은혜' 를 잊었다.


위의 시편이 이렇게 시작하지 않는다. "그들이......여호와께서 행하신 것과 그들에게 보이신 그의 기이한 일을 잊었도다" 그들이 은혜를 잊을 때 그와 동시에,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전능한 주권자이시고, 선한 분이시라는 것도 함께 잊어버렸다. 은혜가 잊힌 곳에서는 감사를 기대할 수 없다. 그들이 은혜의 기억을 잃을 때 그들의 믿음의 눈도 시력을 잃어버렸다. 이제는 어느 것도 믿음의 눈으로 볼 수 없다. 은혜가 잊힌 곳에서는 원망이 지배한다. 이제는 그 누구도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다. 우리의 간구, 감사, 찬양의 소리가 하나님의 귀에 들리듯이, 우리가 쏟아 내는 원망의 소리도 하나님의 귀에 들리는 우리의 고백이 되어 버린다. 원망의 고백이다.


"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에게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 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민14:27-28).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우울러 그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이 가능할까? 하나님을 멸시하면서, 동시에 그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을까? 하나님을 멸시하는 예배자가 있을 수 있을까? 하나님을 대적하면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을까?


하나님을 원망하는 예배자란 없다.


우리의 삶을 돌아보자. 은혜의 기억을 회복하고 잃어버린 믿음의 시력을 다시 찾으면, 우리 삶 구석구석에 하나님의 은혜가 보이기 시작한다. 주의 은혜가 아니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 사도 바울처럼,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디"(고전15:10) 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삶 아닌가? 우리가 오늘 살아 있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다. 우리가 지금 호흡할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이다. 우리는 너무 자주 그걸 잊고 산다.


오래전 감사절에, 당시 어린 아이였던 두 아이에게 종이를 건네주고 감사할 것이 무엇이 있는지 써 보라고 했다. 백 가지를 써 보라고 했다. 두 아이는 난감해했다. 두어 개를 쓰고 나니 더 이상 쓸 것이 없단다. 그러나 아이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자신들의 삶 구석구석에서 감사할 것들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아이들의 감사 노트에는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모든 일에 대한 감사 제목들이 넘쳐나고 있었다. 백 가지로 제한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계속 써 내려갔을 것이다. 불평은 통제하지 않으면 저절로 튀어나오기 쉽지만, 감사는 의도하지 않으면 무심코 지나쳐 버리기 쉽다. 할 일의 목록(to-do list) 을 작성하듯이 감사할 일의 목록(to-thank list) 을 작성해서, 날마다 감사하는 일에 익숙해지도록 하자.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자. 광야를 지나던 이스라엘 백성이, 은혜를 잊어버리고 원망하는 삶을 반복하며 산 것을 본받지 말자. 불평은, 이스라엘에게서 광야를 이겨내며 약속의 땅에 들어갈 힘과 자격조차 빼앗아갔다. 인생을 살아가는 힘은 불평이 아니라 감사에서 나온다. 감사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선하심에 그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나의 인생과 다른 사람들의 인생에 선한 영향을 끼친다.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자. 우리의 삶이 고난으로 둘러쳐 있을 때, 더욱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자. 그 은혜의 기억으로 하나님을 찬양하자. 고난이 끝난 뒤 멀리서 그 고난의 흔적들을 돌아볼 때, 얼굴이 뜨뜻해지는 부끄러운 기억이 되지 않게 하자. 지금 광야를 지나고 있는가? 그렇다면 하나님을 향한 원망과 불만의 소리 대신, 하나님의 선하심에 우리의 마음을 쏟아 놓자. 그리고 그 광야에서 하나님을 노래하자. 그 소리가 하나님의 귀에 더욱 아름답게, 참으로 아름답게 들리는 노래가 되지 않겠는가?


은혜를 잊은 예배자란 없다.

원망하는 예배자란 없다.

하나님의 마음에 그런 예배자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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