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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불굴의 화가 운보 김기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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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보와 우향 (운보문화재단)


불굴의 화가 운보 김기창을 읽고

저자는 정현웅님으로 장편소설 외디푸스의 초상화로 제6회 도의문화저작상을 수상했습니다. 그 외에도 쓴책이 많이 있습니다.



책의 줄거리 운보는 부유한 가정에서 장남으로 1914년 2월 18일에 태어났다. 어릴때 운보는 오전에는 유치원에 나가고 오후에는 글방에 나가게 되어 신구교육을 동시에 받게 되었다. 운보는 7살 때 전염병인 장티푸스에 걸렸다. 각종 약을 써도 차도가 없었다. 어느날 운보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게 되어 버렸다. 온 가족은 갑자기 슬픔에 빠지게 되었다. 어머니는 운보를 인력거에 태우고 이비인후과병원을 찾아가서 진찰을 한 결과 장티푸스로 열이 많아서 청신경이 메말라 버렸고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양약을 써도 한약을 써도 소용이 없었다. 운보의 어머니는 개성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운보로 인해서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게 되었다. 운보는 10살에 승동보통학교에 입학하여 1학년이 되었다. 운보는 학교생활이 지루했지만 교과서의 빈 공간에 연필로 여러 가지를 그리기 시작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어머니가 한글과 한자와 그림을 함께 가르쳤고 운보는 한글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되었다.


운보는 책을 읽거나 그림을 그릴 때는 조용했으나 동네 친구들과 학교 친구들과 장난을 칠때는 개구쟁이 처럼 놀기도 했다. 지나친 장난으로 어머니에게 매를 맞기도 했다. 운보는 유년시절에 화가로서 재질뿐아니라 문학에도 재질을 보였다. 운보가 쓴 동시가 어린이라는 잡지에 당선되기도 했다. 이 일로 많은 칭찬을 받게 되었다. 어머니가 세브란스 병원에서 간호사로 있어서 그곳에서 잡지와 여러 책들을 보고 책을 더욱 좋아하게 되었다. 운보가 16살 때 초등학교를 졸업하게 되었다. 운보는 귀가 들리지 않아서 중학교에 진학할 수가 없었다. 운보의 부모님은 그림솜씨와 글재주를 보고 그 방면으로 실력을 쌓아서 아들을 화가로 키우려는 생각을 했다.


16세가 되던 1930년 가을에 어머니와 함께 이당 김은호 화백 댁을 방문하여 문하생이 되는 것을 허락을 받아냈다.  마침내 운보는 이당화백의 문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당화백은 운보의 가능성을 보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운보는 이당 선생님의 지시로 5월에 있을 조선 미술 전람회를 준비하게 되었다. 운보는 널뛰기라는 작품을 출품했는데 입선했으며 신문에 귀먹고 말 못하는 17세 소년이 어려운 선전에 입선했다는 기사가 특별히 크게 났다. 운보의 어머니는 기뻐했다. 청년시절의 운보는 미술공부에 왕성하고 적극적인 자세로 몰두했고 여러번 입선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운보의 어머니는 건강이 좋지 못한 몸으로 아기를 낳은 후 심장마비에다 뇌일혈이 겹쳐서 두시간만에 숨을 거두게 되었다. 운보는 몸부림치며 통곡을 했다. 자신의 장래만을 위해서 자신을 키워온 어머니를 잃은 아픔에 흐느끼고 또 흐느꼈다. 그 슬픔을 시로 담기도 했다.


그 때에 운보의 어머니는 37세였고 운보는 18세 때였다. 운보는 여러날 어머니를 잃은 아픈 상처로 아무일도 손에 잡히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계속 슬픔에 빠져 있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당장 생활의 문제가 운보의 앞에 부딪혀 왔기 때문이다. 아무 기술도 직업도 없는 아버지와 어린동생과 외할머니만 있으니 눈앞이 캄캄했다. 날마다 끼니를 걱정했고 집안 가족들은 영양부족으로 얼굴이 누렇게 부어갔다. 운보의 나이 19세 되던 해는 말할 수 없는 고난의 해였다. 운보는 어려운 생활 속에서 어머니의 뜻을 잊을 수가 없었다. 운보는 굶주림 속에서도 작품활동을 계속했다. 어느 날 이당 선생님이 운보의 어렵고 가난한 생활을 알고 집으로 불러 그림을 그려오라고 했다. 운보는 10여장의 그림을 그려서 가지고 갔으며 그것을 선생님은 팔아주었다. 세브란스 병원의 부스박사부부도 운보를 여러 가지로 도와주었다. 


한번은 운보가 그림을 그리려고 금강산 외금강 온정리 구룡연을 가게 되었다. 산은 기이하고 기암괴석이 좌우에 깔렸고 새들은 노래하고 개울은 맑은 물이 흘려 내렸다. 사람하나 없는 깊은 산속에서 무서움을 느끼기도 했지만 그는 찬송가를 부름(이 천지간 만물들아 복 주시는 주 여호와 전능성부 성자 성령 찬송하고 찬송하세)으로 마음에 평안을 얻고 힘이 솟아나게 되었다. 운보는 부스박사부부의 권면으로 한국의 풍속을 그림으로 그리게 되었다. 운보의 나이 23살 때 16회 선전에서 ‘고담’이라는 작품으로 특선을 하게 되었다. 신문들은 대서특필을 하였고 이중의 고통을 이기고 특선의 영예를 차지했다고 기사가 나왔다. 운보는 무명의 농아 인으로서 그늘에 있었지만 단숨에 화가의 사회에서 유명인이 되었던 것이다. 17회에는 ‘하일’로 특선을 했고 18회 때는 ‘고완’이라는 작품으로 특선을 했으며 19회때는 ‘여일’이라는 작품으로 특선을 하게 되었고 운보의 나이 26세부터 추천작가가 될 수 있었다. 그가 성공하기까지는 은사가 이끌어 준 힘과 어머니의 헌신과 좌절하지 않고 끈기있게 노력한 운보의 노력의 결실이었다.


운보는 계속 선전에 특선을 하여 추천작가가 되어 활동을 계속 했다. 그 무렵 나중에 그의 아내가 된 우향 박래현 여사는 경성여자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순창에서 2년동안 초등학교 교사로 있다가 교사직을 사임하고 동경으로 가서 동경여자미술전문대학에서 동양화를 공부하고 있었다. 우향이 3학년때 1943년에 선전에 처음으로 출품했는데 특선에다 총독상까지 타게 되었다. 선전시상일에 잠시 귀국한 우향은 선배언니와 함께 운보의 집을 방문하게 되었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사귀게 되었다. 1945년 8월 15일에 운보는 공주에서 우향은 군산에서 해방을 맞이하였다. 운보는 우향과 자주 교제하였고 마침내 결혼할 결심을 하게 되었고 이화여대 뒷산에 올라가서 우향과 나란히 앉아 어머니의 유품인 은반지를 약혼의 표식으로 선물하게 되었다. 1946년2월17일 운보와 우향은 민속박물관에서 결혼을 하게 되었다. 운보의 나이32살, 우향의 나이26세였다. 1948년에는 부부전람회를 가지기도 하였다.


1950년에 6.25전쟁이 일어나자 운보와 우향부부는 우향의 친정인 군산으로 피난을 갔다. 운보는 거기서 예수의 생애를 조선 시대 풍속에 따라 모두 30장의 성화로 완성하였다. 성화를 그리기 전에 이상한 꿈을 꾸게 되었다. 어느날 운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시체를 안고 지하의 무덤으로 내려갔다가 차마 놓고 올라올 수가 없었서 다시 안고 지상으로 올라오면서 몹시 통곡을 했는데 누가 흔드는 바람에 잠에서 깼다. 그것은 꿈이었지만 운보의 눈에서는 눈물이 비오듯이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꿈은 운보의 방이 갑자기 황금색으로 찬란히 빛이 나서 자세히 보니 높다란 예배당으로 변해 있었다. 온보가 놀라며 금빛으로 빛나는 그곳을 보니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찬송가를 부르고 있었다. 운보는 그무렵에 초상화를 그렸다. 전쟁이 끝난 후 성화와 함께 부부전을 가져 많은 호평을 받았다. 운보와 우향은 결혼생활을 하면서 계속해서 필담(글을 써서 하는 대화)으로 이야기 했는데 우향은 필담을 없애고 다른 방법을 찾았다. 우향은 들을 수 없는 운보였지만 말할 수 있는 행복을 되찾게 해 보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운보는 들을 수 없게 되면서 말도 할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우향은 다음 날부터 글로 써서 말하는 것을 줄이고 입을 움직이는 방법으로 대화를 시도했다. 처음에는 몹시 고생을 했다. 그러나 더듬거리면서 말을 하게 되었다. 1955년에는 조각가이며 홍익대학교 교수인 윤호중의 추천으로 교수가 되어 10년동안 제자를 양성하였다. 1974년에는 수도여자 사범대학 미술학부의 교수로서10년 동안 제자를 양성하였다.1960년대부터 운보와 우향의 작품은 세계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미국으로 프랑스로 여행하며 미술의 세계를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그 이후에 우향은 판화공부를 하기위해서 미국으로 가게 되었다. 7년의 세월이 흘러 우향의 판화는 뉴욕에서 인정해주는 판화가가 되었다. 우향은 한국으로 귀국해서 판화전시회를 열어 좋은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우향은 미국에 갔다가 간암이 진행이 되어 온 몸이 처참하게 메말랐다. 우향의 담당 의사 라이만 박사는 소생할 가망성이 없다고 귀국을 권했다. 1975년11월 초에 한국으로 돌아온 우향은 백병원에 입원하였다.1976년1월1일에 숨을 을 거두게 된다.


운보는 1981년을 기하여 운보는 자신과 같은 운명을 타고난 한국의 30만 농아자들을 위해서 농아복지회 회장으로 추대되어 그들을 위해 사단법인을 만들어 일하기 시작하였다. 사단법인을 이끌어가는 모든 비용은 자신의 재산과 그림을 팔아서 내놓았다. 운보는 농아기술학교와 복지부의 도움을 얻어 농아복지 회관을 세우기도 하였다. 그리고 아내 우향과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운향미술관을 청주에 세웠다. 운보는 장애를 이겨냈다는 점에서 모든 장애인들의 모범이 될 것이다. 그는 용기의 사람이었다.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힘을 잃지않고 하면 된다는 용기를 보여준 대표적인 예술가였다.



글, 김진현

서산 성도순복음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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