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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가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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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가까이


시편 기자는 신령한 경지에 이르러서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저를 사랑하는도다" 라고 읊조렸다.


하나님을 좋아하는 것은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 강도가 훨씬 약한 것이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고향을 좋아한다. 그리고 자연의 아름다움과 위엄을 좋아한다. 예술적 창작활동을 좋아하며, 동정심에서 고통당하는 사람들에게 연민의 정을 느끼며, 고상하고 진실하며 좋은 평판을 받은 것들에 대해서 애착심을 가진다. 이와 아울러서 솔직히 말하면 거의 모든 사람은 자신이 또한 하나님을 좋아하되 심지어는 다른 모든 좋아하는 것들보다 더 그러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사랑을 일으키는 모든 좋은 것이 하나님에게로부터 나오며 하나님 자신은 가장 선하시기 때문인 것이다.


게다가 이렇게 하나님을 좋아하는 것은 고상한 감정이며 아주 진지하며 때로는 열정적인 불을 붙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영혼이 실제로는 영원하신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갖지 못하며 하나님과 일대 일로 맺게 되는 구원의 은혜를 체험하지 못하기 때문에 위대하신 하나님을 자신의 구속주로 모셔 들이지 못하고 감격하여 "나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라고 외칠 수는 없을지도 모른다.


일반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란 주로 하나님에 대한 관념, 생명의 근원, 모든 좋은 것의 원천, 잠시도 주무시지 않고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 영원히 변치 않으시는 분에 대한 사랑이다.


그러나 영혼에서 "나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라는 음성이 울려 나올 때에 영원하신 하나님에 대한 관념, 감각 그리고 실재는 구체화된다. 그때에 비로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인도하시는 목자요, 영적으로 우리를 낳으신 아버지요, 우리와 언약을 맺으신 계약주요, 우리와 사귐을 갖는 친구요, 우리를 대속해 주신 구세주요., 막연한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신실하신 하나님이 되시는 것이다.


여러 해에 걸쳐서 일반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느껴왔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아직 하나님을 온전히 알지는 못한 상태인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우리가 인격적으로 그분을 사랑하게 되고 인생행로에서 처음으로 그분과 만남을 가지고 주님께서 우리 옆에 동행하시게 되며 하나님과 우리가 의식적이고 생동적이며 개인적인 특별한 관계를 맺음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며 우리는 그분의 자녀가 될 때에만 얻어지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들 중에 속할 뿐만 아니라 다른 자녀들과는 다르게 하나님과 인격적이고 개인적인 관계, 즉 하늘과 땅 위에서 맺어질 수 있는 가장 친밀한 교제를 누림으로, 그분은 여러분의 아버지, 목자, 사랑하는 친구 그리고 하나님이 되시는 것이다!


이러한 신앙의 원에 이르지 못한 사람은 이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에게는 이것이 너무 심오하기 때문인 것이다. 게다가 만일 그런 사람이 신앙적인 문제에 관심을 기울인다면, 다른 사람들이 친밀한 하나님과 교제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것을 들을 때에 다음과 같이 느낀다. 즉 만일 자신이 그러한 사랑에 도달할 수 있었다면, 지금보다 더 하나님을 열렬하게 사랑하게 될텐데 하고 말이다.


이 사실은 그에게 자신이 이제까지 무엇인가 잃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그래서 그것에 대한 소원을 불러일으켜 주며 그처럼 아름다운 것을 지니고자 갈망하게 된다.


이러한 갈급함은 마침내 더 고상한 신앙에 대한 길을 열어준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시작됨으로, 하나님과 인간 쌍방으로부터 작용이 진행된다. 즉 하나님께서 그에게 가까이하시고 그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간다. 처음에는 그 간격이 멀리 떨어진 상태이나 점점 가까워져서 마침내 간격은 전혀 없어지게 되고 만남이 이루어지는데 그 순간은 너무나 은혜스러워 결코 말로 표현할 수도 없을 정도인 것이다.


단지 그때에만 비로소 하나님께 "가까이" 하게 되는 것이다. 모든 것은 그 가까이함, "하나님께 가까이함이 내게 복이라" 는 느낌 여하에 따른다.


이러한 신비한 체험을 맛보지 못한 사람은 입으로는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시73:27) 고 말할 수는 있지만 그 의미를 알지 못한다. 그는 생각 없이 그렇게 되뇌이는 것이다. 그는 그것이 경건한 정신 구조를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그 자신의 심령으로는 이 신비스럽고 아주 친근하며 인격적인 사랑의 불꽃이 타오르는 것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 하나님께 대한 찬양, 예배 그리고 은혜를 간구하는 기도는 드리지만 그분에 대한 사랑의 애착은 맛보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가까이" 한다는 것은 그분께 아주 근접함으로 눈이 보고 마음으로 깨달으며 자신의 귀로 그분의 음성을 들으며, 그리함으로 모든 분리의 요인들이 제거되는 것이다. 그것은 둘 중의 한 방법, 즉 자신이 마치 하늘로 끌려 올라가는듯이 느끼거나 아니면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내려오셔서 여러분에게 특별한 고난을 안겨 주는 고독한 중에, 또는 기쁨을 만끽하게 하는 가운데 함께 교제하는 것이다.


"가까이" 란 단어는 여러분과 하나님 사이를 떼어놓는 경우가 너무 많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 여러분은 고립되고 고독하고 버림받은 느낌을 갖게 될 때가 빈번하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멀리 떠나 계시거나 아니면 여러분이 그분으로부터 떠나 있으므로 안식을 누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당신 속에 있는 모든것이 여러분을 다시 하나님께로 향하게 하면 그때에 비로소 그분과 멀어지게 하던 요인이 사라지는 것이다. 그때에 하나님과 교제가 이루어지고 그분께서는 당신 곁에 계시며, 자신이 하나님 곁에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는다.


거기에는 다시 축복이 있다. 모든 상상을 초월하는 축복 말이다. 즉 다시 하나님께 가까이한다는 것은, 오! 모든 것에 뛰어날 만큼 너무나 좋은 일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축복이 현세에서는 단지 아주 드물게 체험될 것이다.


그리고 여러분이 영원히 하나님께 가까이한다면, 영생 가운데 그 축복을 누리게 된다. 하늘 아버지의 집에서 영원히 그분께 가까이하는 것이다.


이 세상이 여러분을 하나님에게서 멀리 떼어 놓는 방법은 잔인한 것이다. 속세에서 벗어나서 암자나 수도원으로 피하는 것이 해결책은 못된다. 그러나 하나님과 끊임없이 교제하기 위해서 그러한 조치를 취했던 사람들의 영혼 속에 지속되어진 것 즉, 하나님을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은 이해할 수 있다.


만일에 속세를 벗어났던 사람들이 이 세상을 잊어버릴 수 있었다면 하나님께 가까이하기 위하여 그렇게 하는 것이 해결책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몸은 깊은 은신처에 있다할지라도 마음에는 세상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사탄이 침투하지 못할 만큼 견고한 임자나 거리가 먼 숲속 은둔처는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하나님께 가까이 하기 위해서 속세를 벗어난다는 것은, 하늘 아버지의 집에서만 누리게끔 되어 있는 기업을 스스로 이 땅에서 누려보겠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격리 생활을 함으로 사람들이 많은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눈으로 더 이상 많은 허영 된 일들을 보지 않게 된다. 그러나 그 생활은 비정상적인 것이다. 삶이 옹색해진다. "인간적" 인 것이 작은 차원으로 축소되어 진다. 거기에는 의무, 직업, 능력 발휘가 없어진다. 투쟁이 없어지며 따라서 그것으로 말미암는 승전이 지연되는 것이다.


이 땅에서 하나님께 가까이하는 것은 그것이 인생 광야의 오아시스로서, 죄와 세상에도 아랑 곳 없이 추구되어 질 때에 가장 값진 축복을 초래하는 것이다. 브누엘에서의 야곱, 호렙 산의 모세, 시므이의 저주를 당하는 다윗, 군중들의 야유를 받는 바울 등은 세상이 그들을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떼어놓기 위해서 아주 가혹하게 시험을 했을 때에 가장 고상하고 훌륭한 신앙 경지에 이르렀다. 모든 방해에도 불구하고 세상적인 반대를 무릅쓰고 계속해서 그들은 하나님과 교제를 누렸던 것이다.


투쟁 가운데서 하나님께 가까이하는 것은 축복이다. 그리고 또한 세상이나 죄, 또는 사탄과의 투쟁은 제쳐놓고, 여러분 위에 먹구름이 몰려들고 역경과 손해와 슬픈 일이 마음을 괴롭히며,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을 때에라도, 하나님의 축복스러운 가까이하심은 기쁜 일을 만날 때 보다, 슬픈 일을 당할 때 보다 더 만끽되어지는 까닭에, 하박국 선지자와 같이 여호와를 즐거워하는 것은 모든 신앙 역사상의 교훈이었던 것이다.


허나 세상은 점점 더 잔인해진다. 그 잔인함이 겉으로 보기에는 훨씬 더 아름다움을 조장할지 모르나 그 속에서는 점점 더 치명적인 것으로 되고 있다.


이전에는 사람들에게 생명의 존엄성을 상기시켜 주며, 더 고상한 관심사들을 불러일으키며 마음에 영원을 부각시켜 주는 것들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주 다른 상황이다. 일상 생활에서 우리 영혼에 고상하고 거룩하고 영원한 것에 대해 기억을 환기시켜 주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공공 생활에서 모든 신앙적 반영은 사라져 버렸다. 금식일과 기도일이 정해지지 않는다. 아무도 더 이상 하나님에 관해서 이야기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죽음의 경고를 들어도 자신의 죽음 후에 있을 심판을 예비하지 않는다. 묘지들은 공원들로 꾸며진다. 거룩한 일들이 비웃음을 당한다. 대화와 책들 가운데 천국이 존재하지 않으며 죽음 이후의 세계는 부인된다. 그리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삶보다 하나님 없이 사는 삶이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지만 비교적 번영한다는 것이다.


일상생활에서 이렇게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 하나님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 사이에 강물 줄기 같이 흘러 틈을 낸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신앙은 여러분이 이 물의 흐름에 저항하여 하나님과 단단히 붙어 있으려고 힘쓰는 만큼 분투해야 한다.


특히 우리 시대의 젊은이들과 사랑하는 어린이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세상의 참혹함은 말할 수 없이 위험한 것이다.


그러나 담대하라.


하나님께서 그러한 사실을 알고 계시며 따라서 그의 여원하신 자비하심으로 인해 여러분과 여러분이 아끼는 사람들에게 점점 더 가까이, 친밀하게, 그리고 신속하게 다가오실 것이다. 현대의 이러한 유혹적인 상황 가운데에서조차도 여러분을 위시한 모든 신자들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게 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이 세상과 타협할 때에는 전혀 평안을 얻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막연한 사랑은 어느 때보다 더욱 용납되지 않게 될 것이다.


유일한 구원방법은 하나님께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은밀한 교제를 누리는 것이다. 그때에 여러분은 하나님과 동떨어진 곳에 홀로 서있지 않고 여러분의 영혼과 영원하신 그분과의 인격적인 만남 가운데 점점 더 그분께 가까이 나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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