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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벽 끝에서, 마지막 사랑으로 채우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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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절벽 끝에서, 마지막 사랑으로 채우십시오.

본문 : 베드로후서 1:5~7


5.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6.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7.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2014년도 여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강권적인 감동으로 피켓을 들고 거리전도를 시작하게 하셨습니다.

오늘은 이곳으로…, 내일은 저곳으로 인도하시면서 피켓에 새긴 유일한 소망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 들며 복음을 외쳤습니다.


매일주신 감동에 따라 그 장소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예배하였습니다.

더워도 피켓을 들게 하셨고…, 추워도 피켓을 들게 하셨습니다.

혼자서 했던 그 시간이었지만, 그 시간에 주님은 그곳에서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그때 복음을 외치면서 주셨던 대표적인 하나님의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 마음은 ‘진정한 회개’와 ‘다시 사랑으로’였습니다.

 

사무엘상 3장 3절,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으며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더니 4절,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6절, 여호와께서 다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8절, 여호와께서 세 번째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8절, 엘리가 여호와께서 이 아이를 부르신 줄을 깨닫고 9절, 엘리가 사무엘에게 이르되 가서 누웠다가 그가 너를 부르시거든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라 하니 이에 사무엘이 가서 자기 처소에 누우니라


엘리는 사무엘 선지자의 스승입니다.

그리고 엘리는 40년간이나 이스라엘을 치리했던 유능한 대제사장입니다.

그런데 그에게 한 가지 큰 결점이 있었습니다.

자신의 자식을 잘 교육하지 못했습니다. 그리하여…,


사무엘상 2:12

엘리의 아들들은 행실이 나빠 여호와를 알지 못하더라


킹제임스흠정역

이제 엘리의 아들들은 벨리알의 아들들이더라. 그들이 주를 알지 못하였더라.


벨리알의 뜻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를 말합니다.

극악한 사람들을 말하는데, 후에 사단이나 적그리스도를 가리키게 됩니다.

신약에 와서는, 불법을 행하는 자(요일3:4)를 말합니다.


사무엘상 2장 31절, 보라 35절, 내가 나를 위하여 충실한 제사장을 일으키리니 그 사람은 내 마음, 내 뜻대로 행할 것이라

사무엘상 3장 2절, 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 가서 잘 보지 못하는 그 때에


엘리와 사무엘이 여호와의 처소에 눕습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여러 번 사무엘의 이름을 직접 부르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마다 하나님이 직접 부르시는 이름이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 안에서 이것을 ‘소명’ 즉 ‘부르심’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들입니다.


한 번도 실수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은, ‘그 때에’ 사무엘의 이름을 부르신 것처럼 내 이름도 부르시고 있는 것은 ‘내 마음, 내 뜻대로 행할…’ 즉, 그 부르심에 충실한 제사장(삼상2:35;벧전2:5)을 일으켜 원하셨던 지상 명령을 이루시고자 함이었습니다.


사무엘상 3장 11절,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이스라엘 중에 한 일을 행하리니 그것을 듣는 자마다 두 귀가 울리리라


요즘 들어, 방황하고 있는 주의 종의 모습이 많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막무가내 식으로 표현하는 모습들이…, 그저 표현의 자유 때문에 그런 건 아닌지…,

신성한 성품(벧후1:4)으로 나타나는 것이 성령 하나님의 뜻일진대…, 점점 그 참여에 대해선 오히려 등지며 잊고 지내는 건 아닌지(!) 깊이 생각해 볼 자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본문의 베드로후서는 교회 안에 침투한 거짓 선지자들 그리고 거짓 선생들(벧후2:1)의 미혹(이단을 교회 안으로 끌어 들이는 자)으로부터 당당히 맞서서 싸울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분별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보배로운 믿음(벧후1:1)을 받은 자에게 우선적으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성부 하나님과 아들 예수님의 완전하신 그 뜻이 무엇인지(!) 지금 우리가 분별해야 하는 것은… 다른 사람, 다른 이에게 우선을 주어서 양보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과 그 뜻이 무엇인지(!) 항상 직시할 수 있는 그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 이름을 부르신 목적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내 뜻대로 감정적인 방향으로 가다보면…, 어떤 환경이 이끄는 대로 가다보면…, 그곳에 나를 위해 준비된 웅덩이가 숨어있게 됩니다.


거기 웅덩이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 험난한 시간을, 다시는 되돌릴 수 없다는 사실을 직감하게 됩니다.

그 안에서…, 그렇다 할지라도…, 그 가운데서도…, 깨달음을 주셨다면, 그 은혜에 감사해야 하는 것이 창조주 하나님을 경외해야 하는 사람의 본분(전12:13)입니다.

그럴 때, 그 신기한 능력(벧후1:3)이 썩어질 정욕(벧후1:4)을 넉넉히 이길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창세기 16:11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네가 임신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이스마엘은 이방 여인으로부터 아브람의 씨(육신의 씨)로 낳은 아들의 이름입니다.

이스마엘의 뜻은,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라’는 말입니다.

이때는 아브람이 여호와로부터 ‘아브라함’의 새(거듭난) 이름을 받기 전입니다.


세상의 지혜로 얻은 이스마엘이 얼마 되지 않아 어린 언약의 아들 ‘이삭’을 괴롭히게 됩니다.

그리하여 이방 여인의 하갈과 육신의 씨인 이스마엘은 여호와의 뜻대로(창21:12) 장막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광야에서 갈 길을 몰라 방황하고 있던 이스마엘의 고통을 여호와께서는 들으셨고, 육신의 아버지 아브라함 또한 쫓아 보낸 죄책감 때문에 아들의 고통과 함께 평생 살아가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신뢰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인내(오래참음)를 보시고(히6:15), 응답을 주시는 분입니다.


세상 사람보다, 믿는 우리가 더 허둥지둥해 하는 모습은 아닌지요(!)?

갈팡질팡하고 있는 내 마음에…, 하나님의 뜻과 절제된 믿음은 어디에 갔는지요(!)?


고린도전서 9:25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세상 사람들도 이처럼 승리(성공)의 관을 얻고자 철저히 거짓된 절제를 하거늘, 하물며 우리의 절제된 믿음의 모습은 과연 어디에서 다시 찾아야 하는 것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내 이름을 부르셨던 그 곳에서…, 그 자리에서…, 그 장소로…, 지금 움직이시기 바랍니다.


마태복음 6:6 (메시지 성경)

너희는 이렇게 하여라. 하나님 앞에서 연극하고 싶은 유혹이 들지 않도록, 조용하고 한적한 곳을 찾아라. 할 수 있는 한 단순하고 솔직하게 그 자리에 있어라. 그러면 초점이 너희에게서 하나님께로 옮겨지고, 그분의 은혜가 느껴지기 시작할 것이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깊이 만나셨던, 그 자리를 찾아 다시 가십시오.

분명, 그 자리에서 하나님은 내 이름을 기다리고 계실 것입니다.

나를 움직이는 분은, 오직 주 하나님이셔야 합니다.

말씀만이 나를 움직이게 하는 등불(벧후1:19)입니다.

그래서 내 삶에 분명한 것은, 이 말씀 안에서 오직 성령의 감동이 오는 대로(벧후1:21) 말씀따라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령의 사람은…,


오직 성령으로 보아야 합니다. 오직 성령으로 들어야 합니다.

오직 성령으로 말해야 합니다. 오직 성령으로 걸어야 합니다.


오늘 설교의 본문 베드로후서 1장 5절에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더욱 더 힘써야 할 신성한 성품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행13:48)는 다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이런 믿음의 사람들이, 점점 더 열성을 내야(벧후1:5) 하는 이유는? 다시 오실 심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우리가 자랄 수 있도록(벧후3:18) 그 믿음 안에서 계속 움직이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는 모두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 충만한 데까지 이르도록(엡4:13) 계속해서 자라 가야 합니다.


이것이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뜻입니다.

성령께서 이 모든 뜻을 온전히 이룰 수 있도록, 끝까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본문에는 8가지의 신성한 성품이 있습니다.

특히 이중에서 두 번째인, ‘덕(goodness)’에 대해서 좀 더 상세히 살펴보고자 합니다.

자,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유일하신 영원한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가장 우선이 되어야 하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다음 본문에서 말씀하는 ‘덕(goodness)’은 믿는 우리가 어떻게 받아 드려야 할까요?


우선, 헬라어로 ‘아레테’라고 합니다.

이 단어의 본래적 의미로는 ‘남자다움’인데 즉, 용맹한 남자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이 남자다움 안에, 섬세한 성품으로 다듬어지는데, 그 단어 안에 숨어 있는 뜻이 무엇인지 보겠습니다.


첫 번째, 생각과 감정과 행동의 덕스러운 모습을 말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 겸손 또는 순결과 같은 뛰어난 도덕적 우수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제가 서두에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요즘 들어 방황하고 있는…, 허둥지둥하는 모습들…, 갈팡질팡하는 마음들…, 에 대해서 언급을 했습니다.


하루에도 수많은 미혹들(거짓들)이 믿음의 사람을 공격합니다.

그리고 그 작은 타협이 시작하여 생각은 혼란스러워지고…, 마음은 흔들리고 있으며…, 술 취한 듯 방황하고 있는 모습으로 살게 됩니다.

그럴 때 자신의 모습을 보기는 보는데…, 제대로 보지 못하도록 거짓에 가려진 내 모습을 보면서…, 어쩌면 속고 있는 자신의 참 모습은 어디에 있는지(!) 거울을 보며 찾아 보지만 점점 멀어지게 됩니다.


바로 여기에서 마귀의 간교한 속셈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남자와 여자(창1:17), 다른 두 사람의 정체성을 왜곡하고 있는 마귀의 간교한 속셈들…, 그것은 믿음 다음으로 두 번째 신성한 성품으로 성화되는 과정에서 온갖 잘못된 거짓들을 거짓선지자들과 거짓선생들을 통해서 침투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니, 온전하지 않는 믿음의 사람안에…, 덕(성질)에 지식도 오류, 절제도 오류, 인내도 오류, 경건도 오류, 형제 우애도 오류, 사랑도 오류가 되어 밖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 7절 끝부분을 보면, 처음 믿음부터 시작하여 더하고 더해서 마지막에 “사랑을 더하라”라고 말씀합니다.


특히 '사랑을 더하라' 를 우리말 성경으로 보면, “사랑을 공급하십시오.”라고 번역했습니다.


결국 8가지의 신성한 성품으로 하나 되어 내 몸처럼 사랑하는 이웃에게(마22:39) 똑같은 이 사랑을 공급해 주라는 말의 의미이겠지요.


마태복음 22:36~40

36.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참 선지자와 참 선생이라면, 첫째 계명과 둘째 계명을 강령으로 명심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참 성도가 되도록 멈추지 말고 계속 노력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끝 시선에, 절벽 끝에 있는 어린 한 영혼을 생각해야 합니다.

힘들고 어려운 이때, 믿음의 사람이라면 진정성 있는 태도와 함께 이 고통을 슬기롭게 극복하는 지혜로운 마음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언젠가, 새벽에 주신 마음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종아, 사랑은 책임지는 것이란다.” 라고 하셨습니다.


성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린 영혼을 구원하시려고 아버지의 뜻대로 저와 여러분과 같은 사람의 몸으로 우리에게 직접 오셨습니다.

그 분은 이 땅에 있으면서 인류의 모든 십자가를 다 짊어 지셨고, 그 크신 책임으로 다 이루었습니다.(요19:30) 그리고 영원한 생명도 다 이루셨습니다.(계21:6)


그래서 누구든지 신성한 성품으로 되는 것은, 내게 맡겨진 십자가를 포기하지 않는 것과 끝까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결국 마지막엔 그 십자가 때문에,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영광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은 인류에게 책임 있는 사랑을 직접 보여 주셨습니다.

지금 당장은 그렇게 할 수 없다고 고백했지만, 한번만 더 그 자리를 찾아 하나님을 만나 보세요.


예수님에게 그 십자가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것처럼, 저와 여러분에게도 처음이자 마지막의 십자가가 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에베소서 3:7

이 복음을 위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꾼이 되었노라


사랑하는 여러분,

십자가를 포기하지 마세요.

지는 자는 ‘십자가 때문에’ 라고 말하지만, 이기는 자는 ‘십자가 덕분에’ 라고 말합니다.


절벽 끝에 있는 나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사모하세요.

지금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릅니다.


여러분을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아멘.



글, 김병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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